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두어 달 전부터 시작된 소리의 진원지는 아래층이다. 엄마는 얼마나 지쳤으면 우는 애를 저토록 방치하는 걸까.
첫아이를 키우느라 허둥대던 날들이 나에게도 있었다. 네 명의 조카들이 태어나 자라는 것을 지켜봤고, 내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이 큰바람이었던 나도 그랬다. 백일이 될 때까지는 육아가 두렵기까지 했다. 아이를 낳았다고 해서 저절로 엄마가 되는 건 아니었다. 첫아이의 돌이 지났을 무렵에도 아래층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자주 들려왔었다. 내 아이가 없었다면 악을 쓰며 우는 소리가 참기 힘든 소음이었을 것이다. 이제야 육아에 적응한 나와는 달리 아래층 엄마는 아직도 헤매는 중이라 생각하니, 아이 엄마도 걱정되었다.
어느 날, 참지 못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벨을 눌렀다. 나보다 어려 보이는 여자가 현관문을 열었다. 생기라고는 없고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내 애와 같은 달에 태어난 여자아이가 있는 집이었다. 사는 얘기를 들어보니, 예상대로 여자는 육아를 버거워하고 있었고 아이한테 애정을 못 느끼는 듯싶었다. 아이도 그걸 느끼는지 자꾸 아빠나 아빠 친구들한테만 안기려 한다고 했다. 자주 만나서 아이들을 같이 돌봤고, 밥도 같이 먹고는 했다. 그 후로 울음소리가 덜 들렸던 것 같기도 하고, 들려도 전만큼 신경 쓰이지 않았던 것 같기도 했다.
그때처럼 가엾은 아기와 지친 엄마가 아래층에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온갖 상상과 궁리를 다 하다가 내가 잠깐이라도 봐주면 아기엄마의 숨통이 트이지 않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또 한 마리의 로빈새가 나타난 것이다.
20대에 읽었던 에밀리 디킨슨의 시 한 구절은 내 머릿속에 늘 머물러있었다. ‘힘이 다해가는 로빈새 한 마리를 그 둥지에 다시 올려줄 수만 있어도 저의 삶은 진정 헛되지 않아요.’ <한 가슴의 깨어짐을 막을 수만 있다면>이라는 시의 일부다. 사소한 친절이 한 사람의 고통을 식혀줄 수 있다는 시인의 말에 공감했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다. 내 작은 친절이 세상을 좀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든다고 믿었다.
아랫집의 아기 울음소리는 매일 들려온다. 걱정이 쌓이던 어느 날, 드디어 결심이 섰다. 마침 며칠 전에 얻어 놓은 감자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감자를 봉지에 담아 들고 아랫집으로 내려갔다. 초인종을 누르자 곧 현관문이 열렸다. 아빠와 일곱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애가 현관에 서 있다. 아이들의 터울이 많이 지는가 보았다. 아이 엄마는 안 계시냐고 묻자,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현관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뒤이어 예의 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아홉 살은 됨직한 남자애가 나타났다. 울음소리는 그 남자애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어본다. 도대체 왜 왔는지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내려오지 말아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상황이 펼쳐질 것은 상상하지 못했다. 둘러댈 말도 찾지 못하고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기 울음소리가 많이 들려서 걱정되어 와봤다고 하자, 아이 엄마는 당황해하며 사정 이야기를 했다.
큰아이한테 장애가 있는데 의사 표현을 그 소리로밖에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시끄럽게 해서 죄송하다고, 그래서 밤에는 일찍 재우려 노력한다고 했다. ‘창문이 열려 있었나?’ 하며 순식간에 주방 쪽으로 달려가 확인도 한다. 절대 시끄러워서가 아니고 걱정되어서 내려와 본 것이니 염려 말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감자 봉지를 건네고 받아온 블루베리 한 통이 나를 더 민망하게 만들었다.
이날 이후로 아이의 울음소리가 뜸해진다고 느껴졌다. 이제는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신경이 쓰였다. 아이 엄마는 자신이 충분히 조심한다고 믿었던 게 분명하다. 그런데, 내가 찾아가기까지 하자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을 알아차리고 아이를 더 조심시키는 게 아닌가 싶었다. 당연히 창문은 못 열 것이다. 나의 오지랖이 아이 엄마를 더 불편하게 하고 말았다. 로빈새를 구하려다가 잡는 꼴이 되어버린 게 분명했다.
남 돕는 걸 좋아하는 사람의 특징은 측은지심이 있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 잘하며, 사회적 민감성이 높다고 한다. 공감 능력이 마냥 좋은 것 같지만, 너무 과하면 아파하는 대상에게 되레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지치기도 잘한단다. 나도 이런 적이 종종 있었는데, 그때마다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함부로 손을 내밀었다고 자책하고는 했었다. 제대로 도우려면 공감 능력도 적당한 게 좋고, 나와 대상을 분리해서 볼 줄도 알아야 한다. 적절한 거리 두기는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내 문제에 빠져 늘 허우적댔던 것도 자신과의 거리 두기에 실패해서 과몰입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민감성이 높은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보다는 타인의 욕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한다. 친절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으로 보일 수 있으나, 정작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다른 사람의 욕구를 채워주려 애쓸 뿐이니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다.
나는 다른 사람의 가슴의 깨어짐을 막아주고 싶었던 게 아니라, 내 가슴의 깨어짐을 누군가가 막아주길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주위에 손을 내밀었듯이 세상도 나에게 그렇게 해주기를, 내 아픔을 헤아려 주기를. 한편으로는 작고 사소하기 그지없는 친절을 베풀어 놓고는 디킨슨의 말처럼 나의 삶은 헛되지 않는다고 믿고 싶었으리라. 타인을 구원하기는커녕 자신도 어쩌지 못해 힘들어하는 게 나다. 가장 연약하고 돌봄이 필요한 로빈새는 바로 나 자신이다.
이런 일을 겪고 한 달 정도가 지난 후, 집을 비워달라는 집주인의 요구가 있었다. 급하게 집을 알아봤고, 이사가 진행되었다. 나는 더이상 로빈새를 구하지 않아도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