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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by 정리 dreamer 2023. 1. 23.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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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간 아들의 첫 휴가를 앞두고 있을 즈음, 외사촌 동생 동욱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식구들과 제주도에 놀러 갔으며, 동우도 함께 있다고 했다. 동욱이는 제 남동생이 버젓이 있는데도, 사촌인 동우와 더 자주 만나고 더 많은 대화를 나눈다. 가족여행까지 함께 다니다니. 동생들의 우애에 감동하고 말았다. 아들이 휴가를 나오면 우리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나보다 열 살 어린 동우는 어렸을 때 큰외삼촌이 입양한 아이다. 큰외숙모는 아이를 낳지 못했는데, 둘째 외삼촌의 아들인 동욱이를 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친자식처럼 끼고 키웠다. 동욱이가 집으로 돌아간 후 2~3년 후에 동우를 입양한 것을 보면 아이의 빈자리가 너무 컸음이 분명했다.

동욱이는 나의 외가에서 자라는 동안 외조부모를 비롯해 식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대학생 때 총학생회장을 했을 만큼 쾌활하고 외향적인데, 어려서부터 귀여운 짓을 많이 해서 어른들을 웃음 짓게 했었다. 반면에 동우는 주눅이 들어 어른들의 눈치를 보는 아이였다. 사랑받을 만한 짓은 해본 적도 없었을 것이다.

외할머니가 사랑한 사람이라고는 당신의 둘째 아들과 막내아들, 그리고 첫 손주 동욱이뿐이었다. 동우한테 내줄 마음은 한 쪼가리도 없으셨을 것이다. 몰인정한 성품 탓에 상처받은 가족이 여럿인데, 가뜩이나 마뜩잖은 동우한테는 온갖 모진 말을 거르지 않고 다 뱉어낸 모양이다. 낮에는 남의 집을 전전하거나 동네를 어슬렁거리다가 해가 져서야 집으로 들어가는 날이 많았다고 한다. 무엇을 해도 야단만 맞으니 애써 칭찬받으려 하지도 않았다. 동우의 무기력한 태도는 외할머니의 분노를 더 부추겼다.

동우는 고등학교 대신 충주에 있는 직업훈련학교에 보내졌고, 고생을 많이 했다. 그즈음에 나를 찾아온 적이 있다. 저녁을 먹고 났는데, 자기가 친자식이 맞냐고 물었다. 나는 당황스러웠고, 출생의 비밀이 지닌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동우가 알게 되더라도 나를 통해서는 아니길 바랐다. 다행히도 엄마가 동우한테 해주셨다는 얘기가 생각났다. 너 어렸을 때 잃어버려서 애를 태우다가, 몇 년 뒤에 네 소식이 들려와 겨우 데려왔다는 얘기를 우리 엄마한테 들었다고. 동우는 별말이 없었다.

동우한테서는 간간이 연락이 왔다. 몇 해 전, 눈이 유난히 많이 내리던 날에도 전화가 왔었다. 일 때문에 중국에 나가 있었는데 많이 힘들고 외로워하는 눈치였다. 피를 나눈 부자지간임에도 상처 주고 증오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나눴다. 너는 아빠랑 잘 지내냐고 물었다. 잘 지낸다는 대답 끝에 친아빠는 아니지만요.’라는 말이 들렸다. 얼마간의 침묵이 지나갔다. 겨우 여기는 눈이 엄청 많이 내려.’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눈이 와서 다행이었다.

비밀이 없어지고 나니 동우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입양되던 때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가 일곱 살이었는데 기억이 안 나겠냐며 웃는다. 집에 다시 돌아온 게 아니라 입양된 것이라 확신하는 데는 외할머니의 모진 말이 한몫했으리라.

동우는 입양되기 전 좁은 단칸방에서 부모, 누나와 함께 지냈다고 한다. 아빠는 술에 취하면 폭력적이었고, 그럴 때마다 어린 남매는 도망 다녀야 했단다. 근처 학교의 구석진 곳에 찾아들어 추위와 두려움에 떨며 밤을 보냈던 적도 있다고 한다. 누나라도 찾고 싶지 않냐고 묻자, 그 사람들도 자신의 진짜 가족이 아닐 거라고 했다. 나중에 엄마한테 확인해봤더니, 부모 다 잃고 보육원에 있는 동우를 그 집에서 데려간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생판 남은 아니니 그 형편에도 동우를 데리고 있던 것일 텐데, 동우는 그 집에 아무런 미련이 없는 모양이었다.

최근에는 왜 자기한테 잘해주냐고 묻기도 했다. 그 순간 나는 동우에 대한 감정이 연민 아니었나 싶어 당황했다. 그러나 나는 동우를 불쌍히 여길만한 입장이 못 된다. 동우는 온전한 가정의 부재(不在)로 인해 불행을 느끼겠지만, 온전해 보이는 가정 안에도 온갖 모양의 불행이 존재한다. 내 고통이 더 무겁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나는 감히 동우 삶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다. 다른 세상을 이해할 방법은 없다. 다행히 동우는 의연하게 잘 감당하고 있다.

세상은 공평하다, 네가 갖지 못한 것도 있으니 더 받는 것도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대답했다. 사실은 동우의 말처럼 대단히 잘 해줬다고 할 만한 것은 없다. 동우를 생각하면 늘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동우 주변에는 나만큼 또는, 나보다 더 동우한테 마음 쓰는 사람이 여러 명 있다. 동우가 그것으로 자기 인생의 불행과 행복을 퉁쳤으면 좋겠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말이다.

아들이 마침내 휴가를 나오자 이 외사촌들은 한달음에 달려와 주었다. 아들의 휴가를 핑계로 만난 우리는 새벽까지 많은 얘기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 동욱이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욱이는 적녹색약이란다. 그럴 수도 있다. 내가 정말 놀란 것은 동욱이가 인터넷을 검색해서 그들이 보는 세상을 보여줬을 때였다. 울긋불긋한 꽃밭, 붉은 노을, 도시의 화려한 네온사인이 그들에게는 모두 회색과 누런색을 섞어놓은 듯한 빛깔로 보인다는 것이다. 네가 지금까지 이런 세상을 보며 살았던 것이냐고 놀라워하자, 동욱이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다. 별다른 불편 없이 살고 있다며, 오히려 단풍 구경 가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같은 세상을 보고, 같은 감정을 느끼고 싶은 건 거의 본능인가 보다. 아무리 많은 대화를 나누어도 절대 공감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무언가 단절된 느낌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일었다. 가끔 만나는 동욱이랑 굳이 같은 세상을 봐야 할 필요는 없는데도 그랬다. 다행히 적녹색약을 위한 안경이 있다고 한다. 적녹색약인 남자아이가 그 안경을 끼고 화려한 세상을 처음 접하는 영상을 보고 있자니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났다.

동욱이가 보는 세상은 간접경험이 가능하고 해결책도 나오는데, 기술이 아무리 좋아져도 동우가 살아온 세상을 알 수는 없다. 동우는 내가 가늠할 수 없는 세상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동우가 걸어가는 길을 바라봐주는 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동우의 세상에 안부 인사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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