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입영통지서에는 대구로 가라고 적혀 있었다. 아니, 웬 대구란 말인가. 거기에도 군대가 있었나, 가까운데 사는 애들 데려가지 굳이 이 먼데 있는 애를 오라고 하나 싶어 기가 찼다. 아들은 군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대구에 있는 부대는 훈련도 세지 않고 분위기도 좋다는 정보를 바로 찾아냈다.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었다. 그래. 나쁜 게 있으면 좋은 것도 있겠지.
입영 날. 온 식구가 KTX를 타고 대구역으로 갔다. 덥다는 소문만 들었지, 대구의 8월 더위를 직접 겪어보니 온실에 들어온 듯 열기와 습기가 대단했다. 더위 많이 타는 아들이 걱정되었다. 샌님 같은 아들은 한여름에도 반바지를 입고 외출하는 법이 없어서 이날도 긴바지를 고집했다. 길면서 편한 외출복이라고는 두꺼운 운동복 바지밖에 없었다. 빡빡 민 머리를 감추느라 벙거지까지 뒤집어썼다. 택시 타고, 걷고 하다 보니 땀 범벅이 되었다. 입소시간 될 때까지 땡볕에서 대기하느라 몸은 더 뜨거워졌다. 차를 가져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들어갈 시간이 다가오자 딸이 울기 시작했다. 참았던 눈물이 터졌나 보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다. 딸은 제 오빠를 붙잡고 여러 가지를 당부했다. 제일 마지막 말은 ‘오빠, 죽지 마’였다. 오빠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저렇게 눈물이 나는 거구나 싶었다.
아들은 줄 서서 체온 재고, 뭔가 작성을 한다. 그리고 건물 뒤로 가서 대기하고 있다. 청년들이 순서대로 버스를 탔고, 버스는 부대 안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아들이 버스에 오르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우리는 대구역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딸은 택시 안에서도 계속 울었다. 딸이 우는 것을 구경하느라 나는 울음이 나오기는커녕 웃음이 나고 말았다.
택시 안에서 난데없이 아들의 전화를 받았다. 체온이 내려가지 않으니 귀가하라고 했단다. 아들 몸에서 열이 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열날만한 조건은 두루 갖추지 않았는가. 긴장까지 했으니 오죽할까. 30분도 못 기다려주고 이 먼 데까지 온 애를 돌려보내나 싶었다.
아들은 택시를 타고 대구역으로 돌아왔다. 딸은 제 오빠를 보자 긴장이 풀려서인지 손을 덜덜 떨었다. 역에서 체온을 재봤더니 정상체온이다. 부대에 전화해서 사정 얘기를 했더니, 규정상 어쩔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융통성 없는 그놈의 규정 타령이 답답했지만, 규정을 안 지키는 게 문제지 지킨다는데야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입영통지서를 다시 받고 한 달 반을 기다렸다. 집에서 1시간 거리의 문산으로 가게 됐다. 대구만 아니면 다행이다 싶었는데 이 정도면 천만다행이었다. 예행연습을 해본 덕분에 아들을 떠나보내는 마음이 더 무덤덤했다. 딸도 지난번처럼 울지는 않았다. 엄마들의 가슴이 무너지는 날은 입영 날보다도 훈련소에 있는 아들의 물건이 우편으로 돌아올 때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슬픔은 그날로 미루자.
몇 주가 흐르고, 아들의 물건이 담긴 상자가 도착했다. 그걸 보는데도 나는 무덤덤했다. 옷을 꺼내 세탁기에 넣었고, 상자는 얼마간 보관하다가 버렸다. 추억도 기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들을 걱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걱정하려면 걱정되는 상황을 상상하게 되는데, 그런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잘 지내는지, 아닌지는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이다.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그건 아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어려움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고, 어려움을 겪지 않는 게 좋다고 만도 할 수 없다. 나는 한 가지만 바랬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아들이 잘 이겨내기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어려움이 닥치겠지만, 한 번도 내보지 않았던 힘을 아들이 내기를.
시간은 흐르고, 아들은 휴가를 두 번이나 다녀갔다. 마음이 이상하게 불안하고 걱정되던 때가 있었는데, 이때 아들한테 힘든 일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들어보니 큰 문제가 생긴 건 아니고, 마음먹기에 따라 가볍게 넘길 만한 일이었다. 이럴 때 필요한 게 대담함인데 섬세한 아들은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웃어넘기면 좋으련만.
남들은 타인의 실수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곧 잊어버린다. 자신의 실수를 털어버리지 못하고 되새김질하면서 자책할 때 고통스러운 것이다. 어떠한 사건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게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나의 해석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한다. 아들이 이 진리를 제발 받아들이기를 바랐다. 그일 이후로 나의 불안은 사라졌고, 시간은 잘도 흘렀다.
딸한테 할 말이 생겨서 방문을 열었다. 대낮인데 딸은 침대에 누워 잠에 빠져들고 있는듯한 눈을 하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더니 이렇게 티를 낸다. 잠을 깨워 미안한 마음에 딸 옆에 누워, 할 말은 나중에 할 테니 한숨 자라고 했다. 딸의 팔을 살살 쓰다듬다가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익숙한 냄새가 났다. 코로 숨을 들이쉬며 계속 냄새를 맡았다. ‘엄마 변태 같지.’ 하면서도 코를 대고 있었다.
갑자기, 생각 날듯 말듯한 아들의 살 냄새가 그리워졌다. 아들의 살 냄새까지 기억하는 사람이 엄마구나 싶었다. 우리가 한 몸이었고 피와 살을 나눈 사이라는 게 실감 났다. 아들 끼고도는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조심했었다. 그러나 사실은 순하고 착한 아들이 귀엽고 예뻐서 자꾸 어루만졌다. 기회만 있으면 아들 옆에 앉아서 손이 닿는 대로 주무르고 쓰다듬었었다.
엄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가. 이런 의문을 품으면 사람들은 어이없어한다. 모성에 대한 의심은 금기사항이라도 되는 걸까? 다양한 형태의 모성이 존재한다고만 해두자. 나는 그 당연한 사랑이라도 주기 위해 노력했다. 사랑받는 것에는 자격이나 조건이 필요치 않고, 그냥 그대로의 모습이면 충분하다는 걸 알았으면 했다. 사랑받은 기억이 평생 아들을 지켜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내가 준 건 너무 적고, 미안한 것만 자꾸 생각난다. 군대 보내고 한 번도 울지 않았었는데,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