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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독서

by 정리 dreamer 2024. 11. 27.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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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한 강
출판사 : 창비
초판 1쇄 발행 : 2014년 5월 19일
 
 


 
90년대 초였다.
번화가와 가까운 지하상가에
낯선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접하게 된 참혹한 사진들.
그 어떤 전쟁 사진에서도
이렇게 잔인하고 끔찍한 장면은 본 적이 없다.
 
이런 사건이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일어났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왜 아무것도 몰랐을까.....

지하상가를 빠져나왔을 때,
햇빛 밝은 거리가 몹시도 낯설었다.
 
악몽을 꾸다가 잠에서 깨어나서
크게 안도했던 기억이 몇 번 있다.
견디기 힘든 끔찍한 상황이
꿈이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
현실이 아무리 불행할지라도
악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롭고 안전한 세상이라는 걸 느꼈다.
 
그런데
다만 내가 운이 좋아서
악몽 같은 일을
겪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의 현실이 안전한 건
아니었다.
 
80년 5월 광주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아직도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결코 깨지 않을 악몽이며
죽어야만 끝날 악몽이다.
 
시간이 지난다고 희미해지는 게 아니라,
그 일은 더 선명해지고
다른 모든 것은 퇴색되는 일상을 살아내야 한다.
 
5·18 관련 이야기를 접하면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게
인간의 잔혹성이다.
인간이 그토록 잔혹해질 수 있다니.
 
원수한테 복수하는 것도 아니고,
침략자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것도 아닌데.

무고한 시민들을
그토록 무자비하게 도륙하는 잔인성이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다니.
 
우리 안에 어떤 것이 들어있는지
모르고 살다가
극한 상황에 닥치면 안에 있는 것을 마주한다.
 
시민군들의 용기도 그렇다.
그들에게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상황을 마주하지 않았다면,
목숨을 바치는 게 무섭지 않다고 말하는
‘내 안의 깨끗한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군인들이 시민을 고문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것을
작가는 굉장히 간략하고 담담한 문체로
길지도 않게 묘사하고 있는데,
그들의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런 글을 마주하는 독자도 힘들지만,
그런 글을 적기 위해 머릿속에서
수없이 상상하고, 느끼고,
한 글자 한 글자 기록한 작가의 심정은
어땠을까.
 
우리나라 문화가 세계에 위상을
떨치고 있지만,
불과 45년 전에 야만스런 짓들이
벌어졌던 나라다.
더군다나
인정도 안하고 반성도 없다.
그런 일이 가능하고,
그런 일을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 사회는
악의 씨를 잉태한 것과 마찬가지다.
어떠한 일이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은 사회다.
우리나라는 점점 더 그렇게 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존엄하다는 착각 속에
살고 있을 뿐,
언제든 아무것도 아닌 것,
벌레, 짐승, 고름과 진물의 덩어리로
변할 수 있는 겁니까?
굴욕 당하고 훼손되고
살해되는 것,
그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인간의 본질입니까?”
 
인간이 존엄한 적이 있던가?
피의 역사는 되풀이되고
인간의 폭력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시민군들은 양심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저항했다.
강렬한 양심에 압도당했다.
더 이상 두렵지 않고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대로
행동했다.
사실은
유리처럼 부서지기 쉬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다.
아름다운 것은 악한 것을
당해내지 못한다.
악한 것이 강한 세상이다.
사람들은 강한 것을 좇는다.
세상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 같다.
 
이 책의 주요 인물들은
그 사건의 피해자들이지만
죄책감을 안고 있다.
너무 두려워서 너를 지키지 못했다는
미안함과 죄책감,
더 설득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원망들을
떨쳐내지 못한 채
그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과해야 할 사람들은 미안해하지 않는데
양심이 이끄는 대로 행동했고
서로를 지키려 애썼던 사람들이
상처를 끌어안고 미안해한다.
어찌하여 살아남았다 해도
스스로 생을 마감하거나
지옥 같은 시간을 그저 견딜 뿐이다.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그들을 잊지 않는 것 밖에 없다.
그래서
작가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글자들을
모았을 거다.
 
에필로그를 보면
작가의 가족이 팔고 나온 집으로
이사 들어간 가족이 바로
동호네 가족이었다.
 
아버지가 교사로 있던 중학교에서만
셋이 죽고, 둘이 실종됐는데
그 집에서만 애들 둘이 죽었다.
 
고모가 선봤지만 인연이 되지 않았던
남자의 아내도 만삭의 몸으로
집 앞에서 남편을 기다리다가
잘못되었다.
 
작가가 열두 살 때
5·18을 기록한 사진첩을 보게 되었는데,
마지막으로 본 사진은
얼굴과 목이 총검으로 길게 베어진 소녀였다.
 
그날의 피해자가
자신의 형제나 일가친척이 될 수도 있었고
자신이었을 수도 있었다.

작가는 광주로 내려가
구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구해 읽으려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두 달 동안 자료만 읽었다.
작가의 예민한 감각은 더 이상
버텨내지 못한 듯하다.
광주의 고통에 압도당해서
평범한 일상에 섞여들 수가 없었다.
 
그 사건을 알게 된 순간,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
 
그들의 일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작가의 숙명이었을 것이다.
 
동호는 실존 인물이다.
동호의 아버지는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눈물을 뚝뚝 떨구며 읽고 또 읽었다.
동호가 묘사된 부분에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또 읽고, 밑줄을 또 그어서
책은 손때가 잔뜩 묻었다.
그러다가 돌아가셨다.
그날의 고통은 여전히 존재한다.
 
“어쩌면 한 사람씩 오는 게
아닐지도 몰라.
수많은 사람들이 희미하게 번지고
서로 스며들어서,
가볍디 가벼운 한 몸이 돼서
오는 건지도 몰라.”
 
책 표지의 하얀 안개꽃송이들이
그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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